본디 1박 2일로 거문도와 백도를 가려고 했다. 하필 해상에 강풍이 몰아쳐 배가 결항이 되었다. 뒷 날에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설령 거문도에 도착하더라도 백도 가는 배의 선사는 또 달라, 연락해보니 구정 이후에나 백도 관광이 가능하다 한다. 다행히 청산도행 배는 예정대로 운항한다고 하여, 아침 8시 30분 배로 완도항에서 청산도로 들어간다.
청산농협에서 운영하는 대형 차도선 ‘청산도호’에는 사람에 비해 대형·중소형 트럭이 많이 실려있다. 모르긴 해도 청산도 인근에서 채취한 김이나 매생이를 싣고 오는 차가 아닌가 싶다. 일요일이건만 코로나로 선실은 거의 비우다시피 했다.
#여행의 대명사 청산도, 코로나 비껴갈 수 없어
청산도는 완도군 청산면의 본섬으로 대모도, 소모도, 여서도, 장도 등 4개의 유인도와 여러 무인도를 거느리고 있다. 사시사철 섬이 푸르다고 해서 ‘청산도’라 부른다. 맑고 푸른 다도해와 잘 조화를 이루는 풍경으로 인해 예로부터 신선이 산다는 섬이라 해서 '선산(仙山)' 또는 '선원(仙源)'으로도 불렸다. 완도항에서는 19km 떨어져 있으며, 배편으로 50분이다.
연간 3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온다는 섬이지만 선착장인 도청항과 서편제 촬영장이 있는 당리, 도락리 일원을 벗어나면 어디서든 ‘느림의 미학’ 슬로시티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연일 기상악화가 이어지는 겨울인 데다 코로나의 여파로 선착장부터 을씨년스러우리만큼 한산하다.
청산도는 2007년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선정되었다. 푸른 바다와 푸른 산, 구들장논, 돌담장, 해녀 등 느림의 풍경과 섬 고유의 전통문화 등이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에서 그 가치를 고스란히 인정받은 것이다.
#11개 코스(42km) 슬로길 다 돌려면, 3박 4일은 잡아야
현재 청산도 슬로길은 전체 11코스 17개의 길로 이루어져 있다. 총 길이가 마라톤 완주코스와 같은 42.195km인데 이 길을 마음 먹고 돌려면 족히 3박 4일 정도는 머물러야 한다. 그래야 청산도의 진미를 제대로 맛볼 수 있을 듯하다. 낙조가 일품인 지리 청송해변, 상서마을의 구불구불한 돌담길, 양지리 구들장논 체험, 한때 흑산도 거문도와 함께 고등어와 삼치 파시로 위세를 떨친 그리하여 지금도 그 옛 영화의 자취가 남아 있는 도청리 선착장 골목으로 비집고 들어가 식당과 선술집들도 들러봐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음 기회의 트레일로 미룬다.
마을버스는 당리 지나 읍리에 아주머니 한 분을 내려드리고, 우리 일행만 싣고 달리다 읍리큰재에서 우리마저 내려준다. 눈이 선해 보이는 기사님은 아주머니를 내려드릴 때와 같이 “천천히 가세요”라는 말을 잊지 않음과 동시에 등산로에 서리가 내려 미끄러울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말까지 덧붙인다.
그런데 보적산에서 바라본 남쪽 바다는 해무가 아직 가시지 않아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알 수 없을 만큼 수평선이 몽환적이다. 분명 크고 작은 배들이 뭍을 향해 오는데 그 출발지가 하늘인지 바다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다. 보적산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는 능선을 따라가다 보니 마치 마이산 서봉의 형상처럼 삐죽이 솟은 봉우리가 보인다. 첫눈에 봐도 범상치 않게 보이는 범바위다.
범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는 범바위 주변은 기(氣)가 센 곳으로 유명하다. 범바위 주면 해상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버뮤다 삼각지대나 아이언바텀 해협처럼 지나는 배들의 나침반이 빙빙 돌아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사고가 잦은 곳으로 알려졌다. 범바위의 기가 센 곳으로 알려지면서 부러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바람이 거세게 불 때면 바위틈을 스치는 바람에서 마치 여러 마리의 범이 우는 듯한 소리가 난다고 한다.
# 범바위 ‘느림우체통’에 소원 담은 엽서 부쳐
휴게소를 지키고 있는 아주머니는 “바람이 많고 흐린 날이어서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반갑다”며 수인사를 건넨다. 관광객의 한창 몰려오는 봄이나 가을이면 휴게소는 발 디딜 틈이 없는데 요즘엔 사람 구경 힘들다고 한다. 알고 보니 이분은 서양화가로 아랫마을 권덕리에 사시는데 서울에서 퇴직 후 내려와 2년만 있다가 간다는데 올해로 몇 년째라며 소녀처럼 웃는다. 청산도가 그녀 세월의 발목을 잡아도 싫지 않은 듯했다.
#지금도 눈에 아슴한 ‘서편제’ 촬영 들판, 겨울에도 아름다워
급기야 당리다. 한국영화 최초 1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서편제’와 KBS 드라마 ‘봄의 왈츠’ 등의 세트장이 있는 곳으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다. 1993년 제작된 영화 서편제를 본 사람들은 주인공들이 북을 치고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어깨춤 들썩이던 아슴한 장면을 지금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뿐이랴. 이곳에는 눈을 부릅뜨고 청산도를 지켜온 선조의 얼을 간직한 당집도 있다. 서편제 주막 옆 당집은 본래 한내구(韓乃九) 장군을 모신 신전이다. 구전에 따르면 한 장군은 신라시대 청해진 장보고 대사의 부하로 청산도 수비를 맡았는데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 낸 데다 주민들로부터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그가 죽자, 주민들은 돌무덤을 만들고 그 옆에 당집을 지어 수호신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봄의 전령사 ‘봄까치꽃’, 올해도 봄은 여지없이 온다네
트레일을 거의 마감하며 도청리 선착장으로 가기 위해 도락리를 지나는 길. 길 아래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뻔한 작은 꽃들이 피어있다. 자줏빛 ‘봄까치꽃’이다. 봄의 전령사인 이 꽃은 ‘이른 봄소식을 전해주는 까치와 같다’는 뜻에서 ‘봄까치꽃’이라는 예쁜 이름을 갖게 되었다.
* 가는 방법 및 코스 안내 : www.wando.go.kr - 또는 한국섬뉴스>우측 상단 '가고싶은섬'(지도)>전라남도>청산도(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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