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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최초 슬로시티...완도 청산도

느림으로 강함을 얻게 하는 '치유의 섬'

양진형 기자 | 기사입력 2021/02/05 [18:52]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완도 청산도

느림으로 강함을 얻게 하는 '치유의 섬'

양진형 기자 | 입력 : 2021/02/05 [18:52]

 

 

 

본디 1박 2일로 거문도와 백도를 가려고 했다. 하필 해상에 강풍이 몰아쳐 배가 결항이 되었다. 뒷 날에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설령 거문도에 도착하더라도 백도 가는 배의 선사는 또 달라, 연락해보니 구정 이후에나 백도 관광이 가능하다 한다. 다행히 청산도행 배는 예정대로 운항한다고 하여, 아침 8시 30분 배로 완도항에서 청산도로 들어간다.

 

청산농협에서 운영하는 대형 차도선 ‘청산도호’에는 사람에 비해 대형·중소형 트럭이 많이 실려있다. 모르긴 해도 청산도 인근에서 채취한 김이나 매생이를 싣고 오는 차가 아닌가 싶다. 일요일이건만 코로나로 선실은 거의 비우다시피 했다.

 

 완도항에서 청산도행 차도선 '청산도호'. 주말인데도 승객이 없어 한산하다.

 

#여행의 대명사 청산도, 코로나 비껴갈 수 없어

 

청산도는 완도군 청산면의 본섬으로 대모도, 소모도, 여서도, 장도 등 4개의 유인도와 여러 무인도를 거느리고 있다. 사시사철 섬이 푸르다고 해서 ‘청산도’라 부른다. 맑고 푸른 다도해와 잘 조화를 이루는 풍경으로 인해 예로부터 신선이 산다는 섬이라 해서 '선산(仙山)' 또는 '선원(仙源)'으로도 불렸다. 완도항에서는 19km 떨어져 있으며, 배편으로 50분이다.

 

 도청항에 있는 청산도 상징 조형물.


해안선 길이는 42km로 우리나라에서 23번째로 큰 섬이다. 섬 한가운데에 해발 384m인 매봉산 외에 대봉산(379m), 보적산(330m) 등 300m 내외의 산이 사방에 솟아 있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해 사방으로 흐르는 소하천 연안을 따라 평야와 마을이 야트막하게 형성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남쪽 해안에는 10∼20m의 깎아지른 바다 절벽이 진을 치고 있어 지세로 보면 내유외강 형의 섬이랄 수 있다.

 

연간 3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온다는 섬이지만 선착장인 도청항과 서편제 촬영장이 있는 당리, 도락리 일원을 벗어나면 어디서든 ‘느림의 미학’ 슬로시티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연일 기상악화가 이어지는 겨울인 데다 코로나의 여파로 선착장부터 을씨년스러우리만큼 한산하다.

 

 청산도 남쪽 해안의 절경.


섬을 순환하는 마을버스 탑승객은 우리 일행 2명과 읍리에 사는 아주머니 한 분뿐이다. 함께 배에서 내린 승객 20여 명은 무슨 비책들이 있는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70대 초반으로 뵈는 희끗한 머리의 기사님은 “코로나 이전엔 버스가 미어터질 정도로 승객이 많았는데 요즘은 매양 이렇다”며 헛웃음을 쳤다. 한창 관광철엔 순환버스는 5천 원, 투어버스는 7천 원만 내면 청산도 곳곳의 명소를 둘러볼 수 있으나 모두 발이 묶여있다.

 

청산도는 2007년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선정되었다. 푸른 바다와 푸른 산, 구들장논, 돌담장, 해녀 등 느림의 풍경과 섬 고유의 전통문화 등이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에서 그 가치를 고스란히 인정받은 것이다.

 

#11개 코스(42km) 슬로길 다 돌려면, 3박 4일은 잡아야

 

현재 청산도 슬로길은 전체 11코스 17개의 길로 이루어져 있다. 총 길이가 마라톤 완주코스와 같은 42.195km인데 이 길을 마음 먹고 돌려면 족히 3박 4일 정도는 머물러야 한다. 그래야 청산도의 진미를 제대로 맛볼 수 있을 듯하다. 낙조가 일품인 지리 청송해변, 상서마을의 구불구불한 돌담길, 양지리 구들장논 체험, 한때 흑산도 거문도와 함께 고등어와 삼치 파시로 위세를 떨친 그리하여 지금도 그 옛 영화의 자취가 남아 있는 도청리 선착장 골목으로 비집고 들어가 식당과 선술집들도 들러봐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음 기회의 트레일로 미룬다.

 

 보적산 오르는 등산로.


오늘은 보적산에 올라 청산도와 남서 쪽 바다를 조망해보고 범바위로 하산하여 낭길, 읍리 청룡공원, 당리마을과 서편제 촬영지를 지나 도락리, 도청항에 이르는 12km 구간이다. 슬로시티 5구간 중간에서 1구간까지 통상 트레일의 역순이다.

 

마을버스는 당리 지나 읍리에 아주머니 한 분을 내려드리고, 우리 일행만 싣고 달리다 읍리큰재에서 우리마저 내려준다. 눈이 선해 보이는 기사님은 아주머니를 내려드릴 때와 같이 “천천히 가세요”라는 말을 잊지 않음과 동시에 등산로에 서리가 내려 미끄러울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말까지 덧붙인다.

 

 보적산(330m) 정상.


읍리큰재에서 보적산까지는 1.9km의 완만한 등산로인데 신작로처럼 널따랗게 길을 잘 닦아 놓아 푸르름으로 가득한 숲길 산책로를 걷는듯하다. 길 양옆으로 도열한 난대림과 침엽수들은 죄다 푸른색이어서 ‘사시사철 푸른 섬, 청산’이라는 말에 절로 수긍이 간다. 늘상 그렇듯이 어느 산이든 정상 바로 아래는 가파르다. 암릉으로 이루어진 보적산에 오르니 건너편 북쪽으로 대선산, 대성산, 대봉산 줄기가, 동쪽으로는 청산도 최고봉 매봉산이 버티고 있다.

 

그런데 보적산에서 바라본 남쪽 바다는 해무가 아직 가시지 않아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알 수 없을 만큼 수평선이 몽환적이다. 분명 크고 작은 배들이 뭍을 향해 오는데 그 출발지가 하늘인지 바다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다. 보적산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는 능선을 따라가다 보니 마치 마이산 서봉의 형상처럼 삐죽이 솟은 봉우리가 보인다. 첫눈에 봐도 범상치 않게 보이는 범바위다.

 

 범바위 오르는 길. 

 

범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는 범바위 주변은 기(氣)가 센 곳으로 유명하다. 범바위 주면 해상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버뮤다 삼각지대나 아이언바텀 해협처럼 지나는 배들의 나침반이 빙빙 돌아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사고가 잦은 곳으로 알려졌다. 범바위의 기가 센 곳으로 알려지면서 부러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바람이 거세게 불 때면 바위틈을 스치는 바람에서 마치 여러 마리의 범이 우는 듯한 소리가 난다고 한다.

 

# 범바위 ‘느림우체통’에 소원 담은 엽서 부쳐

 

 범바위 휴게소의 느림우체통


범바위와 작은범바위 사이에는 ‘느림우체통’이 있는데 옆 휴게소에서 엽서를 구입해 사연을 써서 부치면 1년 후에 도착한다고 한다. 엽서를 사, 소원하는 바를 적으며 광양매실로 빚은 청산도 막걸리를 한잔하는데 달짝지근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휴게소를 지키고 있는 아주머니는 “바람이 많고 흐린 날이어서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반갑다”며 수인사를 건넨다. 관광객의 한창 몰려오는 봄이나 가을이면 휴게소는 발 디딜 틈이 없는데 요즘엔 사람 구경 힘들다고 한다. 알고 보니 이분은 서양화가로 아랫마을 권덕리에 사시는데 서울에서 퇴직 후 내려와 2년만 있다가 간다는데 올해로 몇 년째라며 소녀처럼 웃는다. 청산도가 그녀 세월의 발목을 잡아도 싫지 않은 듯했다.

 

말탄바위로 내려서는 길에서 본 범바위(우측).


범바위에서 말탄바위로 내려와 권덕리에 이르러 청산도의 남쪽 바다를 끼고 도는 낭길(벼랑길) 코스로 접어든다. 권덕리에서 읍리앞개까지 약 1.7km의 구간이다. 이 길은 여수 금오도의 비렁길이나 통영 욕지도의 비렁길과 흡사하다.

 

 바람의 피해를 입은 낭길의 고사목. 


오르내리막이 힘들지 않는 소롯길은 난대림의 호위를 받으며 이어져 있고, 좌측 낭떨어지 바다는 쪽빛으로 아득하다. 다만, 두 곳과 다름이 있다면 청산도가 위도상으로 더 남쪽에 있어선지 몰라도 군데군데 V자형 벼랑 위로 바람에 꺾인 고사목들이 많은데 그 형상이 고산준령의 고사목과 흡사하다.

 

 겨울에도 푸르른 청보리밭.


이제 읍리 청룡공원으로 향하는 길. 시멘트 도로의 단조로움을 여기저기 푸르른 청보리밭이 위무해 준다. 수령 250년 이상의 팽나무들이 모여있는 청룡공원에 앉아 두 번째 휴식을 취한다. 보호수들은 모두 산림유전자 보호를 받고 있다고 한다. 청산도 마을 대개가 그렇듯이 읍리마을의 지붕도 하늘색, 주황색, 초록색으로 채색되어 한 장의 엽서와 같다.

 

#지금도 눈에 아슴한 ‘서편제’ 촬영 들판, 겨울에도 아름다워

 

급기야 당리다. 한국영화 최초 1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서편제’와 KBS 드라마 ‘봄의 왈츠’ 등의 세트장이 있는 곳으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다. 1993년 제작된 영화 서편제를 본 사람들은 주인공들이 북을 치고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어깨춤 들썩이던 아슴한 장면을 지금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당리에서 서편제 촬영장 오르는 길.


판소리는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쪽인 남원의 소리를 동편제, 보성·광주 등 서쪽의 소리를 서편제로 분류한다. 전문가들은 동편제는 망치로 말뚝을 박듯이 힘이 넘치고 남성적인 맛이 나는 반면 서편제는 여인의 한이 서린 듯한 계면조의 맛이 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누가 보더라도 청산도 서편제 세트장은 서편제가 가지고 있는 그 맛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곳에 서면 누구라도 우리의 정서에 알게 모르게 흐르는 육자배기라도 한 수 뽑고 싶어진다.

 

 


더욱이, 이 들판엔 봄이면 유채꽃이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 오목이 패인 앞바다와 환상의 조화를 이룬다. 남녘의 화사하고 따뜻한 봄을 만끽하기 위해 도심의 삶에서 지친 사람들이 찾을 수밖에 없는 치유의 섬처럼 여겨진다.

 

그뿐이랴. 이곳에는 눈을 부릅뜨고 청산도를 지켜온 선조의 얼을 간직한 당집도 있다. 서편제 주막 옆 당집은 본래 한내구(韓乃九) 장군을 모신 신전이다. 구전에 따르면 한 장군은 신라시대 청해진 장보고 대사의 부하로 청산도 수비를 맡았는데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 낸 데다 주민들로부터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그가 죽자, 주민들은 돌무덤을 만들고 그 옆에 당집을 지어 수호신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매년 4월이면 한 달간 계속되는 ‘청산도 슬로걷기 축제’로 청산도는 그야말로 ‘봄의 왈츠’를 재연하곤 했다. 하지만 코로나로 지난해에 이 행사는 취소되었다. 올해는 가능할까? 그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운 시점이다. 봄날이면 화려한 그 풍광의 한 무대이던 바다와 양식장의 선단만 그대로일 뿐 들판은 시린 바람 속에서 차갑다.

 

#봄의 전령사 ‘봄까치꽃’, 올해도 봄은 여지없이 온다네

 

트레일을 거의 마감하며 도청리 선착장으로 가기 위해 도락리를 지나는 길. 길 아래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뻔한 작은 꽃들이 피어있다. 자줏빛 ‘봄까치꽃’이다. 봄의 전령사인 이 꽃은 ‘이른 봄소식을 전해주는 까치와 같다’는 뜻에서 ‘봄까치꽃’이라는 예쁜 이름을 갖게 되었다.

 

 봄이면 노란 유채꽃과 그 향기로 그윽할 서편제 촬영 들판.


청산도의 봄은 어김없이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었다. 푸릇한 풀 내음과 달짝지근한 유채꽃 향기, 그리고 해풍 머금은 보드라운 봄바람이 찰랑대는 여인의 머릿결을 어루만지며 예쁘다고 속삭일 것 같은, 그런 봄날 말이다. 올해 청산도의 봄도 여지없이 그런 봄일 것이다. 

 

 *  가는 방법 및 코스 안내 : www.wando.go.kr

     - 또는 한국섬뉴스>우측 상단 '가고싶은섬'(지도)>전라남도>청산도(완도)

 

추천사이트 : 여객선 예약예매 사이트 : https://island.haewoon.co.kr/

                                            완도군 문화관광 : https://www.wando.go.kr/tour/index.cs

                                            대한민국 구석구석 : https://me2.do/xl1EYig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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