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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해경 아카이브/사라지는 항·포구](28)신안 하의면 옥도항
사통팔달의 ‘팔구포’ 항·차도선 운항 큰 변화 없어

옥도는 물이 많은 섬..한때 일본군 해군영지·일본 목욕시설 현재까지 남아

양진형 기자 | 기사입력 2022/04/26 [17:33]

[서해해경 아카이브/사라지는 항·포구](28)신안 하의면 옥도항
사통팔달의 ‘팔구포’ 항·차도선 운항 큰 변화 없어

옥도는 물이 많은 섬..한때 일본군 해군영지·일본 목욕시설 현재까지 남아

양진형 기자 | 입력 : 2022/04/26 [17:33]

옥도 큰마을 전경/서해해경청


전남 신안군은 다이아몬드 제도로도 불린다. 군을 형성하는 1000여개가 넘는 섬들이 다이아몬드인 마름모꼴 형태로 산재돼 있기 때문이다. 하의면 옥도는 이 마름모꼴의 중심 해역에 위치한다.

 

비금, 도초, 하의, 장산, 안좌도 등이 주변을 에워싸듯 자리하고 옥도는 이들 섬의 중간에 홀로 떠 있듯, 가까운 인근에는 작은 섬들마저 없다. 이런 지리적 위치와 특징으로 옥도는 예전부터 ‘팔구포’로 불렸다.

 

옥도를 중심으로 바닷길이 8군대로 열려 있어 다른 바다로 빠져나가기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접근성의 편의는 1800년대 말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옥도에 주둔했던 이유가 됐다. 당시 일본은 이곳에 우물을 파고 해군 ‘영지(기지)’를 건설해 중국 함대와 전쟁을 벌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조성된 '일본해군정'으로 불리는 목욕시설/서해해경청


일본 해군기지로의 활용이 언제까지 지속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 주민들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파놓은 목욕시설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고 말한다.

 

송홍님 할아버지(82·큰마을)와 송영주 할아버지(80·큰마을)는 “섬의 동쪽 사면의 산발치에 항상 물이 고이는 샘이 있고, 마을 사람들은 일하다 목이 마르면 이곳에서 물을 마셨다”며 “왜정 때는 이 샘 아래에 일본군들이 콘크리트로 연못을 만들어 놓고 목욕을 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같은 목욕시설(가로 약 5m, 세로 약 1.5m의 수조시설)은 ‘일본해군정’으로 불리는 샘 아래에 현재까지 분명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일제강점기에 축조 또는 이후 보수됐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옥도는 일본군의 ‘목욕시설’이 남아있을 만큼 여타의 섬들과는 달리 물이 풍부하고 물맛 또한 좋다고 한다.

 

윤귀월씨(76·큰마을)는 “옥도는 땅을 파면 물이 나올 정도로 지하수를 파서 실패한 적이 없는 곳이다”며 “가뭄에 물이 부족하면 인근 하의도에서 물을 길러 올 정도로 물이 잘 나오는 섬이다”고 말했다.

 

옥도 선착장/서해해경청


팔구포로 불릴 만큼 사통팔달의 해역에 위치하고 물이 풍부해 살기 좋은 섬이지만 옥도의 교통편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목포와 연결되는 차도선은 하루 2회 운항되지만 뭍으로 나갈 때는 하의도까지 돌아서 나가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 하지만 주변에 큰 섬이 많고 이들 섬의 길목에 위치했기에 여객선은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다고 한다.

 

“목포 앞선창을 출발해 안좌 복호-장산-옥도 순으로 운항했고, 이후 장병도-하의 상태-신의도를 거쳐 하의도 봉도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아침 목포로 다시 나갔습니다.”

 

옥도 토박이인 송상호씨(76·큰마을)는 40여 년 전 옥도와 인근 섬을 운항하던 여객선은 목포까지 4~5시간가량이 소요됐다며 현재와 같은 차도선이 다닌 지는 20여년 가량 된다고 말했다.

 

옥도 풍경/서해해경청


1970년대 당시, 옥도는 선생님만 5명이 있고 아이들이 120~130명 있는 제법 규모가 큰 섬이었다. 때문에 당시 섬에는 술집을 비롯해 ‘전빵(구멍가게)’이 여러 개 있었다고 한다.

 

“옥도에 마을이 3개 있었는데 마을마다 전빵이 있었고 이곳에서 과자와 담배는 물론 막걸리와 소주, 홍어 등을 팔았습니다.”

 

송씨는 “당시 가게에서 파는 홍탁(홍어와 막걸리)의 맛이 참 좋았다”며, “그 때는 이발소도 있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 가게 하나 없고 모든 생필품 구입은 물론 머리카락을 자를 때도 목포에 나가야 한다”고 섬 생활의 불편을 소개했다.

 

한 주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섬에서는 먹거리 마련이 어렵다며 당시에는 집집마다 돼지를 2~3마리씩 길렀다고 밝혔다.

 

“돼지를 1년 정도 키우면 150~160근이 나가고 이 돼지가 먹기에 참 좋습니다. 마을 사람 4명이 다리 하나씩을 사서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었습니다.”

 

돼지를 사고팔기도 했다는 한 주민은 “새복(새벽)에 돼지 4다리를 묶어 ‘목나무’에 끼운 다음, ‘대칭(작대기 저울)’으로 ‘근수’를 달아 사고팔았다”며 “돼지는 여객선이나 화물선에 실려 목포 상인들에게 건네졌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돼지를 팔기 전날 사람들이 왕창 먹이고 물도 억지로 많이 먹이는 경우가 많아 목포에 도착하면 20근이나 축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40~50여년 당시 돼지 한 마리 가격은 10~15만원 선이었다고 한다.

 

우물/서해해경청


옥도의 경우 물이 풍부해 비교적 논농사도 많이 지었다. 하지만 고구마도 식량이었으며 주민들은 고구마의 경우 춥거나 온도가 변하면 썩기 때문에 방안에 짚으로 넓고 기다란 사각형 모양의 ‘두대통’을 만들어 고구마를 보관했다. 이렇게 하면 5월까지도 먹을 수 있었다.

 

돼지의 주요 먹이는 보리와 나락의 속재(속겨)와 ‘겉재(겉겨)’ 등이었다고 한다.

 

송상호씨는 “50여년 전까지만 해도 ‘똥방애(방아)’로 벼와 보리를 찧었다”며 “이 방아는 세게 누르면서 정미되기 때문에 깨진 쌀도 많았고 단단한 보리의 경우 물을 섞어가며 방아를 찧었기에 ‘겉재’와 ‘누까(속재·속겨)’가 한꺼번에 나왔다”고 기억했다.

 

당시 ‘똥방애’ 삯은 한 가마다 한말씩으로 1할이었는데 이 한말을 말단위로 가져가는 것이 아닌 되 단위의 고봉으로 담아갔기에 1할이 훨씬 더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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